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뒤발리에 (문단 편집) ===== 뒤발리에의 최측근 3인방 ===== 뒤발리에 치하에서 반인륜 범죄의 주축을 담당한 3인방은 다음과 같으며, 모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성을 보여준 것은 물론이고 생전에 어느 정도 만행의 대가를 제대로 치렀다. * [[https://en.wikipedia.org/wiki/Luckner_Cambronne|'''루크네르 캉브론(Luckner Cambronne, 1930~2006)''']] - 가난한 설교자의 아들로 태어나 국립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클레멘트 바르보가 축출된 [[1960년]]부터 [[1971년]]까지 통통 마쿠트의 2대 수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뒤발리에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정권의 2인자로, 직접 고문과 살인에 가담했다는 증언은 없긴 했어도 통통 마쿠트의 모든 악행들을 총괄한, 누구보다도 잔인한 대장이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과 잔인함으로 인해 캉브론은 '''아이티 역사상 두 번째로 무서운 인물[* '첫 번째로 무서운 인물'은 당연히 캉브론의 상관이었던 프랑수아 뒤발리에이다.]''', '''카리브의 흡혈귀(Vampire of the Caribbean)'''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는데, 사실 캉브론이 후자의 별명을 얻은 이유는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본인이 운영한 혈장 센터인 '헤모-캐리비안(Hemo-Caribbean)'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의 병원과 대학에 빈자들과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혈액과 시신을 정기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었으며,[* 이 혈장 센터는 혈액 튜브를 재사용하는 등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기에 [[HIV]] 전파를 가속화했다는 역할까지 했다고 하며, 캉브론이 이렇게 미국에 밀매한 혈장은 매달 5톤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캉브론은 자신의 '산업'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살해했다. 참고로 그는 하원의원 연단에서 연설할 때 '''좋은 뒤발리에주의자는 (뒤발리에를 위해) 그들의 자녀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거나 (뒤발리에를 위해) 그들의 부모를 죽이는 어린이들입니다(Un bon duvaliériste est prêt à tuer ses enfants et les enfants à tuer leurs parents)'''라는, [[패륜]]을 타당화하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캉브론은 뒤발리에의 1964년 헌법 개정과 종신 대통령직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1963년부터 1967년까지 공공 사업, 교통 및 통신부 장관도 역임하며 인프라 개발을 명목으로 세운 '국가 재건을 위한 국영 운동(MRN)'이라는 유령기업에 부유층들과 외교관들이 선의로 모금한 돈과 공적 자금을 횡령하고 이 돈을 개인 사업을 위해 사용했는데,[* 심지어 (본인은 부인했으나) [[대마초]]를 재배하고는 밀매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는 의혹도 있다. [[https://repository.duke.edu/dc/radiohaiti/RL10059-RR-0009_01|#]]] 그렇게 횡령한 돈이 당시 가치로만 무려 '''1천만 달러'''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 돈은 1967년을 기준으로 하면 2023년 환율으로는 무려 약 '''9천만 달러(!)'''에 달한다.] 1971년에 프랑수아가 사망한 후 캉브론은 1년 6개월 동안 국방부 및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만 20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린 대통령의 종신 특별 고문으로 일하며 아이티의 실권자로 여겨졌던 만큼 총리직을 노려보기도 했으나, 프랑수아의 아들인 장클로드의 세습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1972년 12월에 프랑수아의 미망인인 '마마 독(Mama Doc)' 시몬[*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생전에 루크네르 캉브론과 불륜 관계였다고 한다.]과 장클로드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미국]]의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로 망명하여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살았다. 미국에 망명할 초기에 캉브론은 제대로 죗값을 치르기는 커녕 마이애미의 부촌에 있는 집에서 살면서 매주 주말마다 개인 제트기에 위스키와 여성을 태우고는 [[라스베이거스]]나 [[산후안]]에 있는 [[카지노]]의 단골이 되는 등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 1970년대에 사업가도 아닌 사람이 개인용 제트기를 보유하고도 돈이 펑펑 남아돌았을 정도면 캉브론이 얼마나 막대한 금액을 부정하게 취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카페 사업체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나마 다행히도 [[하판락]]과 [[딘코 사키치]]와는 달리 그렇게 누리던 생활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캉브론은 사업도 실패하고는 카지노 중독으로 돈이 고갈되어 아이티로 돌아갈 돈을 구한다는 구실로 장클로드 뒤발리에에게 돈을 빌리는 신세가 될 정도로 몰락하였고[*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1986년]]에 축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캉브론은 '''길어야 13~14년 정도만 부를 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려 '''반세기 이상이나(!)''' 뻔뻔하게 부를 누려온 하판락과 사키치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는 합당한 결말을 맞은 셈.], 그렇게 빌린 약간의 돈으로 간소한 집을 산 후 아내 이나 캉브론(Ina Cambronne)와의 사이에서 딸 6명, 아들 2명, 많은 손주들, 심지어 증손주까지 보며 조용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 물론 현 기준으로도 1천억 원이 넘는 거액을 불과 10년 남짓만에 다 탕진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의미에서는 가장 비참한 몰락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다가 캉브론은 말년의 3년 동안 [[신부전]]과 [[당뇨병]] 환자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전 측근들의 말에 따르면 캉브론은 수술에 필요한 기구를 살 수 없어 일주일에 한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며, 결국 캉브론은 [[2006년]] 9월 24일 오전 3시 30분에 플로리다에 있는 침례교 계열 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반인륜적 체제 하에서 인권탄압에 가담한 사람의 대명사격으로 언급되고, 몰락하는 듯 보였어도 한동안 잘나가는 듯 싶었다가 처참히 몰락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티판 [[노덕술]]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는 셈이다. 캉브론은 망명 생활을 할 때에도 자신이 '뒤발리에주의자'임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고, 장클로드가 축출된 후에도 장클로드가 아이티로 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을 넘어 아이티의 모든 행사를 지켜보며 항상 자신이 언젠가는 아이티에서 다시 권세를 누릴 수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캉브론이 죽자 캉브론의 딸 중 한 명은 아버지의 만행들을 '잘못된 정보'라고 부인하며 "가정적인 남자로서 그는 정말 훌륭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캉브론의 친구 중 한 명도 "친구와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습니다. 나는 그가 평화롭게 떠났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적어도 캉브론은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www.wehaitians.com/sept%202006%20supplement%20news%20and%20analysis%20this%20month.html|#]] * '''막스 아돌프 부인(Madame Max Adolphe, 1925~2018)''' - 본명은 로잘리 보스케(Rosalie Bosquet)이며, '막스 아돌프'는 그녀의 남편이자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아이티의 공중보건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원래 재봉사로 일하다가 여성 권리 운동을 하며 아이티 여성 운동 회장직을 역임했던 그녀는 1961년에는 아이티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공동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하급 장교로써 통통 마쿠트에 가입하는데, 그녀가 이때 본색을 드러냈는지는 몰라도 뒤발리에는 그녀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녀를 포트 디망슈 감옥의 소장 겸 통통 마쿠트의 여성 지부인 Fillettes Laleau의 최고 책임자로 승진시켰다.[* 9살 아이를 직접 죽이고 갓난아기를 제물로 바치게 한 악마와도 같은 독재자를 깊게 감명시킬 정도였으면 통통 마쿠트 평대원 시절에도 극도로 잔혹한 면모를 보여줬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뒤발리에의 신임을 받은 그녀는 직접 '독창적인' 성적 고문을 설계할 정도로 교활한 인물이었으며, 직접 정치범들을 '폭력적으로' 심문하거나 남녀 가리지 않으며 수감자들을 손수 성고문하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 남편의 정부까지 성고문했다고 한다.] 부하들이 구타하면서 울부짖고 몸부리치는 사람들을 지켜보거나 손수 수감자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하면서 '가학적인 기쁨'을 느끼기도 한 데다가 심지어는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고문을 총괄하거나 고문당하는 수감자들의 모습을 담은 녹화 자료들을 보관하기도 했다. 그녀는 '파파 독'의 사후에 포트 디망슈 감옥의 소장에서 해임당하고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성별 덕분(?)에 프랑수아 뒤발리에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유는 알 수 없다.] 1972년 5월까지 짧게 포르토프랭스의 시장을 역임하며 도시의 하수 처리 작업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행적을 보이지 않았고, 1986년 2월에 시민 봉기로 인해 폭도들에게 집을 약탈당한 후 잠깐 포로로 잡혔다가 수녀로 변장하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그녀는 어떠한 소식도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은둔]] 생활을 했기에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으며, '1986년에 자살했다' '현재 아이티에서 멀쩡히 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와 비슷하게 [[우간다]]의 악명 높은 반군 '신의 저항군(LRA)'의 수장 [[조지프 코니]]도 2005년에 LRA가 우간다에서 추방되자 [[수단 공화국|수단]]의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의 후원으로 수단 [[다르푸르]] 지역으로 도피해 철저히 은거 생활을 하며 (이전의 위세를 완전히 잃은) LRA 병사들에게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얼마나 철저히 은거 생활을 하는지 그 역시 사망설이 나돌 정도였다.] 이후 그녀의 근황은 망명 32년 뒤인 [[2018년]]에야 전해지게 되었는데,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2018년 11월 18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미국 [[조지아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http://www.haitian-truth.org/madame-max-adolphe-died-this-week-in-georgia-usa/|#]]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캉브론처럼 대규모로 거액을 축적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물론 그녀는 포트 디망슈의 소장이었을 시절에 그녀의 거주지를 사용하기 위해 미국 특수부대로부터 월마다 수표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그동안 모은 돈으로 떵떵거리며 살았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그녀가 사망한 조지아에서는 아이티계 미국인들이 '''만 단위로''' 살고 있는 판인 만큼[* 2000년에 조지아에 사는 아이티계 미국인은 35,000명 미만이었으나, 그녀가 사망한 2018년 기준으로는 8만 명의 아이티계 미국인들이 조지아에 살았다.] 미국에 망명한 막스 아돌프 부인은 과거의 행적이 교포들에게 드러나 보복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인과응보|30년 넘게 고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숨어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후술할 것처럼 말년에 딸이 장관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공개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녀가 미국으로 망명을 간 후에 [[개명]]했으면 지금까지도 사망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적어도 사망 사실이나마 확인되었을 정도면 망명 후에 개명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녀의 딸인 마갈리 아돌프 라신(Magalie Adolphe Racine)은 아이티에 거주하며 패션 및 모델링 산업과 관련된 기업을 경영하며 아이티에서 패션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미셀 마르텔리(Joseph Martelly, 1961~)[* 2011~2016년에 아이티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인기 많은 대중음악 가수였다.] 아이티 대통령 부부의 고문 겸 의전 책임자로 활동했고, 2013~2014년에는 청소년, 스포츠 및 시민 행동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인 조르주 라신(Georges Racine)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미국 국적을 가진 것이 드러나 얼마 안 가 자리에서 해임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갈리 라신은 마르텔리의 취임 이후 마르텔리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인연 덕분에 [[낙하산 인사|장관으로 오른 것이었다고 한다.]]]. * '''뤽 데지르(Luc Désir, 1925~?)''' -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으며, 프랑수아 뒤발리에 치하부터 뒤발리에의 부하로 일해오다가 [[장클로드 뒤발리에]] 시기에는 아예 통통 마쿠트 수장을 역임한[* [[1981년]]에 쿠데타 모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고 한다.] 인물이었는데, 그 역시 잔혹한 인물이었다. 임신 6개월차의 임산부와 아이티의 전 대통령 뒤마르세 에스티메(Dumarsais Estimé, 1900~1953)[* 뒤마르세 에스티메는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아이티의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에스티메는 아버지가 지주에 삼촌이 상원의원인 요즘말로 [[금수저]] 출신이었으며, 아이티의 농촌과 인프라를 개발하는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하며 아이티인들의 삶을 일시적으로 증식킨 데다가 국가 부채를 줄이며 [[1947년]]에는 미국의 재정 통제를 종식시키고 [[1949년]]에는 '''개발도상국 최초로''' [[엑스포]]를 개최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1950년에 폴 마글루아르의 쿠데타로 쫓겨난 후(그러나 마글루아르도 정책에서는 에스티메의 노선을 이어받으며 아이티를 카리브해 최고 휴양지 중 하나로 만드는 등 나라를 무난하게 통치해나갔다.) 해외를 전전하다가 1953년에 [[뉴욕]]에서 객사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들 덕분에 오늘날의 아이티인들은 에스티메에 대해 나라를 발전시킨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러모로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와 유사한 길을 걸은 인물인 셈.]의 조카 2명을 고문해 죽인 적이 있는 데다가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며 부하들에게 고문을 명령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고문당하는 피해자들의 비명을 테이프로 녹음하고는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들었을 정도로 냉혹한 인물이었다. 성경이나 기독교를 학살의 합리화에 악용한 것으로 보면 아이티판 [[조지프 코니]]라고도 볼 수 있다. 데지르는 뒤발리에 정권이 몰락한 후인 [[1986년]] 2월 25일에 [[에어 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푸에르토리코]]로 도피하려고 했으나 데지르에 대한 원한이 워낙 사무쳤던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공항으로 달려가 활주로를 짓밟고 비행기 창문을 부수며 '데지르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면 항공기를 파괴하겠다'는 발언까지 하며 데지르의 도피를 막았고, 결국 비행기 조종사는 데지르를 태우지 않고 데지르는 군인의 보호를 받으며 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민중들은 다음 날에 수영장까지 갖춘 데지르의 저택을 점거하고는 그의 집에 있던 심문 자료들과 [[네오 나치|나치 관련 서적들]]을 약탈했다. 악행이 워낙 컸던 나머지 1986년 7월 23일에 열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였으나, 데지르는 '난 기독교인인데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내 주변에 좋은 것만 나눠준다.' 등의 [[적반하장]] 격 망발을 남기며 항소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유죄 판결을 '국가에 대한 망신'이라고 주장하며 아이티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비록 수감은 되긴 했으나, 1989년 9월 20일자 LA 타임즈에 따르면 데지르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징역 30년으로 또다시 감형되었다.[* 이 시기에 감형을 받은 뒤발리에 시기 인사의 수는 데지르를 포함하여 무려 14명에 달한다고 한다.] 아이티의 인권운동가 장클로드 바주(Jean-Claude Bajeux)는 이 감형에 대해 '뒤발리에주의자를 향한 화해의 제스처이며 '''다음 단계는 완전한 사면이다''''라고 비난했는데, 이 말처럼 데지르는 1991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라울 세드라스(Raoul Cédras, 1949~) 대통령에 의해 끝내 사면되었으며, 사면 이후에는 외국의 해안가로 망명해 2000년 기준으로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망명 후 어떻게 살았는지가 상세히 알려진 캉브론과 적어도 사망 날짜와 장소만큼은 확인된 막스 아돌프 부인과는 달리 데지르의 사망 여부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는데, 만약 살아있다면 2023년 현재 98세의 노인일 것이다. 다만 재판 당시에 데지르는 [[당뇨병]]이 악화되어 발을 절단하고 의족을 차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 시점에서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http://faculty.webster.edu/corbetre/haiti-archive/msg05151.htm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